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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시묵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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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시묵
청원부원군
淸原府院君
신상정보
출생일 1722년
출생지 조선
사망일 1772년 음력 7월 29일
사망지 조선
국적 조선
가문 청풍 김씨
부친 김성응
모친 남양 홍씨 홍우녕의 딸
배우자 의춘부부인 남씨
당성부부인 홍씨
자녀 아들 김기대, 김기종
효의왕후
묘소 김시묵묘
(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)

김시묵(金時默, 1722년 ~ 1772년 음력 7월 29일)은 조선문신이자 국구이다. 정조의 장인으로,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의 아버지이다. 본관은 청풍이며, 시호는 정익(靖翼)이다.

생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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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722년(경종 2년) 태어났다. 현종명성왕후의 아버지인 김우명의 고손자이며, 아버지는 병조판서를 지낸 김성응이고, 어머니는 남양 홍씨 홍우녕의 딸이다. 훗날 김성집에게 입양되었으며, 김우명의 봉사손이 되었다[1]. 본관은 청풍, 파계는 문의공파이며, 는 이신(而愼 또는 爾愼)이다.

1741년(영조 17년)에 진사가 되었으며, 1750년(영조 26년) 한림의 회권을 행할 때 4명 중 1명으로 선발되었다[2]. 이후 지평, 부수찬, 정언, 교리, 장령, 집의, 대사간, 도승지, 경기감사, 수어사, 대사헌, 이조참판, 호조참판, 호조판서, 병조판서, 공조판서, 어영대장 등 대내외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. 그러나 1771년(영조 47년) 은언군은신군에게 수레와 가마를 제공한 혐의로[주 1] 일시적으로 탄핵되었다가[3] 이내 석방되기도 하였다.[4]

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, 1772년(영조 48년) 음력 7월 29일에 향년 5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[1]. 사후 좌의정에 추증되었다. 정조 즉위 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청원부원군(淸原府院君)의 작위가 더해졌다[5]. 시호는 정익(靖翼)이다.[6]

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의 청풍김씨문의공파묘역에 있으며, 두 부인과 합장되어 있다[7].

가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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본가
  • 친부 : 김성응(金聖應, 1699~1764)
  • 친모 : 남양 홍씨 홍우녕의 딸
    • 친동생 : 김지묵(金持黙, 1724~1799)
    • 친동생 : 김치묵(金峙默)
  • 양부 : 김성집(金聖集)
처가
  • 장인 : 의령 남씨 남직관(南直寬)
    • 첫번째 부인 : 증 의춘부부인 남씨(贈 宜春府夫人 南氏)
  • 장인 : 증 찬성 남양 홍씨 홍상언(洪尙彦)
    • 두번째 부인 : 당성부부인 홍씨(唐城府夫人 洪氏, ?~1791[9]) - 증 찬성(贈) 홍상언의 딸

참고 자료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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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《영조실록》
  • 《정조실록》

각주

[편집]
내용주
  1. 당시 은언군과 은신군은 김귀주의 무고를 받아 삭탈관직되었다. 《두산백과》〈은신군〉항목 참고
참조주