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홍섬

조선의 문신

홍섬(洪暹, 1504년 10월 17일(음력 9월 10일)~1585년 3월 11일(음력 2월 11일)[1])는 조선의 문신이다. 본관은 남양 토홍계으로 아버지는 영의정 홍언필이며, 조광조의 문인이다. 자는 퇴지(退之), 호는 인재(忍齋), 시호는 경헌(景憲)이다.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.

생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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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528년(중종 23)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.

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, 정언을 지냈다.

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(金安老)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(許沆)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되었다.

1537년 김안로가 사사(賜死)된 뒤 3년 만에 석방되었다(1540). 그 뒤 수찬, 부제학, 경기도관찰사, 대사헌을 거쳤다.

1552년(명종 7) 청백리(淸白吏)에 녹선(錄選)되었다.

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

이듬해(1559) 좌찬성 겸 이조판서로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삼대임(三大任)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좌찬성을 사임하였다.

1560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서 이량(李樑)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하였다

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되어 예문관 · 홍문관의 대제학을 지냈다.

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. 그 해 6월 28일 명종이 승하하고 7월 3일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로서 원상(院相,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)으로 서정(庶政)을 처결하였다.

1568년 4월 1일 우의정에 올랐다.(1568.4.1-1571.5.1)

1571년(선조 4) 5월 1일 다시 좌의정이 되어 궤장(几杖)을 하사받았다.(1571.5.1-1573.3.12/1차)

1574년 4월 11일 영의정에 승진되었다(1574.4.11-8.10/1차).

1575년 7월 1일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(1575.7.1-1576.8.1/2차)

1576년 12월 6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(1576.12.6-1578.11.1/2차)

1578년 11월 1일 좌의정을 사임하고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.[2](1578.11.1-1579.2.1/3차)

1585년 사후 남양의 안곡사(安谷祠)에 제향되었고, 시호는 경헌(景憲)이다.

문장에 능하고 경서에 밝았으며 검소하였다.

흥양으로 유배당하였을 때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가사 「원분가(寃憤歌)」가 있으며, 저서로 『인재집』과 『인재잡록』이 있다.

1591년(선조 24)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는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.

가족 관계[3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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같이 보기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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각주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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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1. 김귀영, 《동원집》 권2,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 경연 춘추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세자이사 강녕군 홍 공 섬 신도비명
  2. 홍섬 - 한국학중앙연구원
  3. 《국역 국조인물고》권39 음사(蔭仕) 홍세태의 묘지명(墓誌銘)
  4. 부친 송질, 남편 홍언필, 아들 홍섬이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.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사례이다.